▒ 겨레얼연구원 ▒
 
 
흔히 사람들이 일상에서는 공기의 존재나 그 고마움을 모르듯이 우리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땅에 대해 무관심할 때가 많아서 우리 강산의 가치나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 산다.



  참된 희망의 본보기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고문 고종환

참된 희망은 큰 생각과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수군은 1597년 7월 15일 새벽 거제도 칠천량(七川梁)해전에서 크게 패하여 조선함대를 거의 다 잃고 말았다. 이때가 바로 정유년 왜란이 재발(정유재란丁酉再亂 AD1597년)된 해였다.

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지상군마저 무너져 내린 처참한 상황에서 그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제일 먼저 취한 조처는 경상도 운곡에서 하동, 전라도의 구례, 곡성, 보성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사정을 살펴서 위로하고 달래며 생업에 종사하라고 설득을 하였고 지방 수령들에게 희망을 전파한 일이었다. 이때 백성들은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고 희망에 차 환호하며 다투어 술을 갖다 바칠 정도로 호응했다.

왜군은 그때 육군 11만 5천, 수군 7천 200여 명 등 12여 만 명이 넘는 군대가 전라도를 경유하여 충청도에서 경기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전황이 불리하니 해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세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전선(戰船)이 12척이나 남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맞서 싸운다면 해볼만 합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隻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만일 우리의 수군이 전폐한다면 적들은 만 번 다행으로 여길 뿐 아니라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戰船)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장계를 올렸다.

한편 왜군의 호남 침공을 두려워하는 수령들에게도 행정력을 복원해 전쟁에 철저히 임하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병정모집이 가능하게 되었고, 백성들까지 전쟁에 협조하는 총력전 체제가 급속히 갖춰졌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8월3일부터 곧바로 총력을 다해 안전한 군량창고를 최대로 확보하고 남은 군함을 찾아내 함대를 재편성함과 동시에 수군 장수들을 보충하고, 군사들도 계속 충원하는 등 전쟁 방책을 철저하게 대비했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장군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군함 13척과 초탐선 32척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으나 승선 인원이 적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객관적인 판단으론 병력과 군함 수, 그리고 화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선 수군이 막강한 왜군에 승리하는 길은 바다라고 생각하여 해전에 참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에 명량해협에서 적을 저지․격파하는 전술을 철저히 연구하여 필승의 전략을 세웠다.  

9월16일 이른 아침 시작된 명량(鳴梁)[울돌목]해전에서 왜수군은 명량의 순류(順流)를 타고 거침없이 전진해온 것에 비해 조선수군의 배들은 왜수군 함대를 조류에 역류해서 맞아야 했기 때문에 수부(水夫;격군)들이 노를 힘껏 저어도 조금씩 뒤로 밀려서 전투가 시작된 처음에는 조선수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수군을 독려하며 침착하게 적을 기다렸다. 왜군은 이순신이 탑승한 함선을 보자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에 장군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고 기수가 깃발을 올리자 육지 양쪽 끝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려댔다. 물레에는 뾰족한 것이 매달린 쇠줄이 연결돼 있었다. 바닷 속에 늘어져 있던 쇠줄이 팽팽해지면서 위로 당겨졌다. 쇠줄을 이용한 철쇄전법에 앞장 서있던 왜의 선두함 밑바닥이 걸렸다. 그러니까 빠른 조류를 타고 그 뒤를 달려오던 왜군의 다른 배들이 선두함을 들이받고 연달아 자기편의 배들과 충돌하여 급히 진형이 무너졌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왜적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왜군들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이 혼전 속에 바다에 떨어진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시체를 끌어올려 목을 베어 뱃전에 내걸자 일본군은 동요했다. 다시 조류가 조선수군 쪽에 순류로 바뀌어 전세는 완전히 조선수군에 유리해졌다. 왜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이 넘는 함대를 이겨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31척이 격침된 반면 조선 수군은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이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호남 지역의 제해권을 되찾게 됐다.
울돌목 싸움은 조선수군이 칠천량 패전으로 거의 전멸의 상태에 놓였고, 그때가 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받은 지 불과 한 달 십여 일밖에 안된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크나큰 승리를 거둔 전투이며 그 해전은 바로 정유재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했다.

이순신 장군의 참된 희망의 추구와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은 우리 민족에게 삶의 본질인 희망을 일깨워주고 참된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앞으로는 더욱 확고한 신념과 참다운 희망으로 삶을 가꾸어 나가자.  

                                                                        (2005. 01. 17.(月) 중소벤처신문 13면  게재)
체험적 경제이야기(1)
이제 참 희망을 설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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