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레얼연구원 ▒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동서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사람은 왜-(무엇 때문에) 사는가"
그 의문의 궁극적 해답을 얻으려고 기나긴 시간을 쏟았고 엄청난 정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질문은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프스가 마치 높은 바위산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온힘을 다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바로 그 순간에 바위가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떨어져 버리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시지프스의 영겁(永劫)의 형벌"과 같은 것이 아닌가.
삶의 목적에 대한 해답은 시지프스의 신화 같은 헛된 수고인지 모른다.
그저 답이 없는 어려운 길을 더듬어 갈 뿐이다.



  부자의 미덕

* 참다운 부자의 조건

우리나라 의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세브란스병원이 한국 땅에 세워진 지 어느덧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브란스병원은 애초에 광혜원이었다.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85년 미국선교사 알렌 박사가 서울의 재동에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창설한데서 그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 뒤 광혜원의 이름을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발족했다. 그리고 1899년에 제중원 의학교를 설치하고 교장에 올리버 에비슨이 취임했다.
그 에비슨이 1900년 미국에서 열린 해외선교회에서 제중원의 병원증설자금을 지원 요청했을 때 기쁘게 기금을 기증한 사람이 존 D 록펠러와 함께 클리블랜드의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을 운영하던 대주주였던 세브란스(L.H.Severance)였다.

세브란스의 기부로 1904.9.3 서울역 맞은편 복숭아골(현 도동)에 병원을 준공하고, 완공한 것이 1904년 11월이다. 제중원을 이전하고 기증자 이름을 따 ꡐ세브란스병원ꡑ으로 개칭했다.    

세브란스는 1907년에 직접 한국을 찾아와 병원을 보고 다시 거액을 기부했으며 자기 주치의까지 보내 세브란스에서 봉사하게 했다.
그리고 무료로 병원 운영이 어려워질 때마다 도와준 사람은 초기 기금 기증자 L.H. 세브란스의 아들인 존ㆍ세브란스였다.

세브란스가(家)의 자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지난 50년 동안 병원에는 "미국 북장로교회" 명의로 후원금이 입금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병원 직원들은 "미국 교회가 좋은 일 하나 보다." 라고만 생각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병원측에서 돈의 출처를 깨보니 세브란스의 아들이 만든 기금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정조 임금 때인 18세기 후반에 김만덕(1739~1812)이라는 여인은 제주에서 활동한 여자 상인이다.
만덕은 본디 제주 양반가문의 딸로 태어났으나 10여 세에 고아가 되었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만덕은 늙은 기생집에 의탁하여 살다가 더 이상 늙은 기생에게 신세를 지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각기 헤어진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도 나이가 조금 들자 자청해서 관기가 되었다. 기생 명단에 올렸습니다. 만덕은 나이 스물이 넘었을 때 자기는 본래 양반의 규수임을 관에 호소하여 가까스로 기생의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 뒤 만덕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장사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십 수 년 만에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정조 16년(1792년)부터 정조 19년(1795년) 약 4년 동안 제주에는 큰 흉년이 들어 식량사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특히 1794년에는 국가에서 보낸 구호 식량마저 풍랑으로 도착하지 못하여 제주도 백성들은 아주 심한 기근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거지 신세가 되어 떠도는 부랑인들이 늘어만 갔다. 1795년 봄에는 그 참상이 극심했다.
만덕은 많은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놓고 전라도 상인에게 급히 양곡을 사서 보내도록 배편을 마련하여 제주로 운반했다. 그 중 아직 조금은 자기 친척들을 살리는데 쓰고 그밖의 많은 곡식을 모두 관에 실어 보냈다.

제주 목사는 정부에 만덕이가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정조는 만덕의 공을 칭찬하여 상을 주고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만덕은 극구 사양하고 그 대신 금강산을 유람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나라의 법은 제주 여자들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특별히 만덕을 내의원에 의녀로 임명하여 서울로 오게 했다. 이 때가 1796년(정조 20년) 가을로서, 만덕의 나이 57세였습니다. 만덕은 상경한 뒤 왕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후한 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반년 동안 서울에 머무르면서 유명 인사들을 만났으며 1797년 늦은 봄에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고 제주도로 돌아갔다.

김만덕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채제공의 [번암집]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남아 있다.
부와 귀(富/貴)의 모범
사랑은 우주만물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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